1. 설교에 매여 있는 삶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설교를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워가신다. 성도는 매주일 선포되는 하나님의 구속계시인 복음의 설교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되고 양육되며 갱신됨을 경험한다. 따라서 목사들은 성경 본문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속계시로서 성도들에게 선포될 수 있는가를 오랜 시간 연구하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한 주일까지 목사에게 주어진 시간은 3-4일 정도가 될 것이다. 어쨌든 주어진 3-4일의 시간동안 매일매일 말씀을 놓고 기도해야 하며 밥먹으면서도 생각하고 자면서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매주일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울 때가 많다. 그러기에 설교에 매여있는 삶이란 목사로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 예술을 하는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작품을 만들어 가듯이 목사는 매주일 한 편의 설교를 향해서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평생 사는 것이 목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은혜가 그렇게 살도록 할 것이다. 나의 1년 뒤, 5년 뒤는 어떨까,, 나는 나의 미래를 잘 모르겠다. 내가 단지 바라보는 것은 이번주 주일 예배와 설교이다.
2. 성경적 설교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은 개인의 느낌이나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구속계시로서 계시 역사가 있다. 계시 역사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해 신약교회로, 그리고 옛 언약 백성들의 심판인 AD70년 예루살렘 심판으로 완성되었다. 따라서 구약을 설교할 때에 이러한 계시 역사를 고려하여 신약에서 성취된 과정을 증거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성취된 관점에서 이야기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대략 4000년을 뛰어 넘어서 바로 나에게 적용하여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합니다. 라고 적용하는 식의 설교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로 갈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설교가 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삶을 도덕적인 모범으로 보고 바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설교에 익숙해지면 복음이 없는 인간의 자아성찰로 이어지고 자기 철학에 빠지게 된다. 물론 그런 복음이 아닌 설교로도 개인적인 변화도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일까? 더구나 도덕주의와 율법주의는 참 복음의 설교를 핍박하고 반대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설교에 익숙해진 사람은 제대로 된 복음을 설교할 때 대부분 증오심을 품거나 좀 교양있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나가는 것을 항상 경험했다.
3. 개혁신학
신대원을 다니면서 개혁신학 성경을 가장 합당하게 해석하는 정통신학임을 알게 되었고 초대교회와 종교개혁의 뿌리임을 알게 되었다. 칼빈은 사도바울의 신학을 정리한 어거스틴과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들을 잘 소화하였고 중세의 모든 신학에서 오류들을 제외하고 성경의 진리만을 취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종교개혁을 꽃 피웠다. 그러므로 개혁신학은 칼빈 혼자만의 신학이 아니라, 사도들의 서신서, 초대 교회 교부들, 어거스틴의 신학을 반영하여 세운 것이다. 특히 어거스틴이 정립한 삼위일체론, 인간론, 은혜론 등등의 교리를 부인하면 당시에는 이단으로 정죄당할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입장은 사도바울의 입장이며 예수님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신학이 하나님과 성경에 가장 합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편협한 것이 아니다. 성도로서 지극히 당연하게 취해야할 입장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고 교회로 부름받은 성도가 하나님과 성경에 가장 합당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성경의 입장을 가장 정통하게 정리한 개혁신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4.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이 말은 종교개혁이 한창 무르익을 당시에 개혁교회의 타이틀 중 하나였다. 그래서 오늘날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교회들, 또는 개혁신학을 지향한다고 하는 목회자들이 곧 잘 하는 말이다. 나 역시 저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고 갱신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으로 개혁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봤을 때에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교리를 많이 공부하기, 그리고 착하게, 또는 은혜롭게 이런 말로 얼버무린다. 그것은 개혁신학이 뭔지를 모르고 개혁, 개혁 하는 것과 같다. 개혁신학은 교리만 많이 배우고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만 내세우는게 개혁신학이 아니다. 개혁신학은 교리를 설교하든 성경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든 한 가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귀결되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음으로 결론이 나고 그에 따른 복음의 적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매주일 복음으로 개혁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매주일 복음이 선포되지 않고 도덕적인 삶, 경건주의적으로 귀결시킨다면 개혁은 되지 않는다. 개혁이 되는 것 같지만 성령으로 새 창조된 개혁이 아닌 것이다. 개혁교회는 항상 복음으로만 개혁되어야 한다.
5. 개혁교회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참된 복음을 안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개혁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소수 있다. 그들은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행해지는 왜곡된 설교와 교회의 횡포에 벗어나서 참된 복음을 찾아 개혁교회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이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자신의 영혼(성경에서 영혼은 전인격을 지칭함)이 수년동안 잘못된 교리와 잘못된 복음을 먹고 뒤틀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왜곡된 교회에 남아있으려는 무책임한 사람들보다야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개혁교회에 가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성도는 참된 복음의 설교를 통해서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 매주마다 갱신됨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더욱 뿌리 깊이 심겨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참된 복음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변화가 동반되지만 지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전인격인 영혼의 변화로 이어진다. 즉 참된 복음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헌신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여기서의 헌신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교회에 충성, 봉사하라는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헌신이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처럼 하늘의 삶이 이 땅에 뿌리내려지도록 헌신하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참된 복음을 안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투신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다. 참된 복음을 찾아 개혁교회에 가입하려는 사람들의 목적이 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의 신앙 생활은 옛 생활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자신의 욕심을 드러낼 것이다.
6. 하나님의 존재냐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이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에 대해서 즉 신론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 그런데 신론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계시냐 안 계시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천주교는 존재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의 존재, 즉 계시냐 안 계시냐? 를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 이것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인격과 사역과 구속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창조사건을 너희들이 증명에서 나의 존재가 사실임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창세기의 창조사건에서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다스리시는 언약의 왕이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는 믿음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면 생기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건 왠만하면 인정한다. 무신론자도 결국엔 하나님 같은 누군가가 존재한다고 인정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는건 알겠는데 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롬1:18-21) 전부 왜곡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곡된 하나님이 아닌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하나님을 전달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신론을 교정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 출발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하나님을 다 믿는다고 하지만 진짜 성경의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어떤 사람은 이런 느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어떤 사람은 저런 느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신론이 수 십가지가 된다. 그렇지 않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동일한 신론을 고백했다.
7.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교리가 없이는 다른 모든 교리에는 아무런 뜻도, 아무런 의미나 목적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교리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면 구원의 교리나 죄의 교리를 살펴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이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할 바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이 되어야 한다. 즉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분, 복이 아니라 복 자체의 근원이자 샘이 되시는 분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소망들이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나는 구원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해! 그런 사람은 구원이 우상이 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소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 소망을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 하나님 사랑이 제일 좋아?
인간은 혼합체이다다. 인간은 영혼도 있고 몸도 있고 몸의 여러 지체들이 있다. 그런데 인간을 구성하는 것들 중에 뭐가 하나 없어져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고를 당해서 팔이 없고 다리가 없을지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모든 게 다 있는데 전능하심이 없다면 하나님이 아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의 단순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이런 혼합체가 아니라는 뜻에서 단일하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하다는 말은 사람이 단순하다고 말할 때의 단순하다는 뜻이 아니고, 그 본질이 복합적이거나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지거나 할 수 없다는 뜻에서 단순하다는 것이다. 즉, 그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구별될 수 없으며 서로 모순을 일으킬 수 없게 하나로 있다는 뜻에서의 단순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그 속성은 곧 그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각 속성이, 그 절대적 온전성 때문에, 그의 존재 전체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속성은 여러 성품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 어떤 부분은 사랑이고, 또 어떤 부분은 지혜고, 또 어떤 부분은 전능이고...이렇게 나누어지고 구분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복합되어서 하나님 전체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전체가 사랑이시고 하나님 전체가 능력이시고 하나님 전체가 지혜이시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해서 나는 사랑의 하나님이 좋아, 나는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주시니까 좋아 등등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한 부분만을 좋아하고 믿는 것은 참된 신앙 고백이 될 수 없다. 게다가 현대 교회들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굉장히 왜곡된 사랑이 대부분이지 않은가?
9. 성경을 뒤로 하고 계시를 추구하는 자는 광신자이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만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잘못된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직관적인 감정이나 내적인 빛이 있는데 이 내적인 빛을 따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자신안에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내적인 빛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추구하는 많은 부류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영지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자신 안에 영적인 지식, 영적인 빛이 있어서 그 영적 지식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한다. 또한 신비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계속 신비적인 체험을 추구하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말씀을 잘 배우는 것에 관심이 없고, 소위 불을 받으면 된다고 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이 환상이나 직통계시로 말씀해 준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상이나 직접 말씀하심은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까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던 방법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환상으로 말씀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신약의 사도들이 활동하고 죽고 난 후부터(a.d.70년 성전파괴와 함께 옛 언약의 완전한 종료후부터) 이런 식의 계시는 중단되었고 이제는 오직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인 벨기에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그렇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장로교든 감리교든 신앙 고백을 따르지 않고 여전히 아직도 환상을 보았다, 꿈에서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거짓된 것으로 인도하는목사들이 있다. 기도원에는 그런 목사, 기도원 원장, 소위 영빨? 있는 권사들이 즐비하다. 물론 교인들도 그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단언컨대 그들은 종교 장사꾼들이다. 1세기 종교 장사꾼들도 예수님께 호되게 책망을 들었고 그들은 a.d.70년 성전의 파괴와 함께 심판 당했다. 성령은 분명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에 성경을 떠나서 역사하지 않는다. 환상을 보고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부 성경을 떠난 오류투성이의 이야기들이다. 과연 성령님께서 그런 오류 투성이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시겠는가?
10. 왜 엉뚱한 결론에 이를까?
성경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이 과연 믿을만한가? 성경은 과연 오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성경을 보는 방식이 다양하게 존재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성경론을 통해서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오류를 바르게 교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우리가 성경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있다. 신약 성경에는 성경 자체를 잘 이해하게 하는 아주 중요한 구절 넷이 있다. 성경이 어떤 책인지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요한복음 5:39, 히브리서 1:1-2, 디모데후서 3:16. 벧후1:20-21. 이 네 구절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제를 인정하고 성경을 봐야 한다. 첫째,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모든 면에서 타락한 존재들이다. 그러니깐 우리의 모든 면-이성과 감정과 의지-전인격이라고 하는 모든 것들이 죄의 영향을 받고 죄를 향하도록 기울어져 있다. 둘째, 더군다나 우리의 이성은 완전하지 않다. 정말 한없이 모자라다. 이것이 전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내 이성을 가지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성경을 판단할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인간의 지혜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성경은 계속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러한 전제를 무시하면서 끊임없이 이성으로 지혜로 하나님을 판단하고 성경을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들은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성경이 제시한 방법으로 성경을 탐구해야 한다.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이 어떤 방식으로, 어떤 관점으로 기록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 나가야 하는지 성경에 이미 나와 있는대로 탐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탐구하지 않고 내 이성과 지혜로 성경을 탐구하는 것은 접근 방법이 틀렸기 때문에 엉뚱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11. 한국 교회에 널리퍼진 잘못된 성경관
1) 이성주의 성경관
이성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다루려고 하는 입장이다. 만일 이성과 말씀이 대립하게 된다면 이성주의자들은 무엇에 더 권위를 두는가? 그것은 바로 이성이다. 이성주의자들은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에 성경이 맞지 아니하면 그들은 성경을 버리고 인간의 이성을 취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성주의자들은 성경의 계시성을 부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성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계시의 내용의 의미를 설명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2) 신비주의 성경관
개인적인 경험이나 감정의 신앙을 중요시 여기는 신비주의자들은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이나 감정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이들은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느냐보다는 내가 무엇을 체험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의 체험이나 자기의 감정을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세워놓는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체험했으면 그만이다는 주장이다. 자기의 체험이 성경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신비주의자들의 성경관이다.
3) 감정주의 성경관-슐라이에르마허
이 성경관은 신학의 토대롤 계시, 교리, 성경과 같은 객관적인 것에 토대를 두지 않고 인간의 감정, 또는 자기 의식에서 찾음으로써 신학을 주관화했다. 이 감정은 문화나 예술에서 경험되기도 하지만 종교는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탐구하는 분야에 해당 된다고 말한다. 기독교 교리는 기독교적 종교 감정을 말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계시는 외적일 수 없다. 오직 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계시이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예수님을 존경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은 종교적 감정이 매우 독특했고 탁월한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교리나 구속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자꾸 감정을 자극하는 설교나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교리없이, 구속의 말씀없이도 감정으로 하나님을 느끼려고 한다.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을 느낄 수 있겠는가?
4) 로마가톨릭의 성경관
로마 가톨릭은 성경을 대할 때에 교회의 권위를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카톨릭은 성경을 강조하지만, 성경보다 더 강조하는 것이 교회의 권위이다. 그 이유는 교회가 성경(정경)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늘날의 신구약 성경을 교회가 만들었고, 또한 지켜왔고, 그리고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교회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5)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칼바르트
신정통주의는 최근에 와서 생긴 하나의 신학적인 경향으로 실존주의적 철학 방법론을 통해 성경을 보려고 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 전체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체험된 말씀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말한다. 성경 가운데 어떤 말씀이 나에게 다가오고 경험될 때 비로소 그것이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성경관은 성경이 말하는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잘못된 성경관에 입각해서 잘못된 말씀이 난무한다.